#
십여 년쯤 전이다. 그 때의 나는 지금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었다. 지금의 금발과는 다르게, 나는 단정하게 자른 검은 머리에 검은 뿔테 안경을 쓴 모범생이었다. 말수와 친구는 거의 없었고, 성적은 톱이었다. 다만 어긋나고 비뚤어진 심성만이 그대로였다. 그는 겉보기엔 지금과 별 다를 것은 없었다. 숯 적은 단발에 창백한 피부. 작아 보이는데 키는 은근히 크다. 다를 것이 있다면, 그 때의 그는 어쩐지 필사적이었다.
- 넌 뭐가 불안해서 그런 짓을 다 하냐.
내가 그에게 던졌던 질문이었다. 그는 아무런 답도 하지 않았다.
#
진득진득한 무언가가 목구멍 속으로 잔뜩 달라붙었다. 벌레처럼 살갗을 기어다니는 공기는 차가웠다. 멍한 기분으로 시계를 바라보니, 시간은 이미 일곱 시였다. 그는 작은 숨소리를 내며 잠들어 있었다. 잔뜩 웅크린 채로 새우잠을 자는 나와는 달리 곧은 자세였다. 잠시 그를 바라보던 나는 그를 흔들어 깨웠다. 나 때문인지 잠이 옅은 그는 금방 눈을 떴다. 반쯤은 감겨 있었다.
- 일어나.
- ….
- 일어나라니까. 나 밥해줘. 배고파.
- ……어… 알았으니까 그만 흔들어.
실망스럽게도 부족한 잠은 그의 냉정을 무너뜨리기엔 아직 역부족인 모양이었다. 입을 조금 내밀고 있자니 그가 느리게 일어나 고개를 조금 흔들었다. 눈 아래에 피곤이 거멓게 쌓인 것을 보아 간밤의 섹스가 버거웠던 모양이었다. 사실 밤에 한 잠도 자지 못한 나도 제정신은 아니었다. 그것을 알아챈 그는 내게 입을 맞추며 물었다.
- 괜찮아?
- 견딜만 해. 밥이나 해줘. 먹고 잘 거다.
- 밤에 뭐 했는데.
- 곡 썼어.
섹스를 마치고 그가 잠든 후부터 주욱 쓴 노트북은 과열되어 있었다. 그는 뜨끈뜨끈하게 달아오른 노트북 전원을 끄고 욕실로 들어갔다. 나는 멍한 기분으로 허공을 응시했다. 밤 시간에 잠을 자지 못하는 나로서는 밤낮에 당연히 뒤바뀔 수 밖에 없다. 이 생활에 적응되지 않았다고는 할 수 없지마는 아직까지도 밤을 새울 적마다 눈이 따끔거리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그가 들어있는 욕실을 흘금 보고 자리에서 일어나 거실로 나갔다. 벽 한칸을 차지한 네모진 어항은 고요했다. 베타는 잠을 자는지 깨어 있는지 모르게 눈을 뜬 채로 동동 떠 있었다. 새끼, 넌 좋겠다. 거긴 물속이니까 눈 따가울 걱정 없겠네. 부러움을 담아 욕설을 던져주고 어항 옆 포대에 손을 넣어 물고기 밥도 한웅큼 넣어주었다. 베타의 꼬리가 살랑거렸다. …언제였던가. 꿈에서 본 장면이었다. 조개같이 커다란 흰 꼬리가 살랑살랑.
#
잠이란 무의식 상태에서 휴식을 취하는 행위이다. 그리고 꿈은 뇌의 활동상태가 각성시의 것과는 달라지면서 일어나는 표상의 과정이다. 대부분 시각적 심상이며, 때로는 청각, 미각, 후각, 혹은 운동감각과도 관련되는 경우가 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럴 것이다. 나도 그와 크게 다른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다만 나의 꿈이 다른 이들의 것과 다른 점이라면ㅡ
숨을 쉴 수가 없어…
왜…? 거기 있는 것 만으로도…?
존재감.왜…? 거기 있는 것 만으로도…?
괴물, 인간, 동물, 하다못해 책상 위에 반토막난 몽당연필이라도. 온 몸을 짓누르고 숨조차 쉴 수 없게 하는, 그런 존재감. 주로 출몰하는 괴수들은 더하다. 잠든 중에 눈물을 흘리는 일도 비일비재, 이 나이 먹고 이불에 지도 그린 적도 여러 번. 정신과 상담도 여러 번을 받아봤지만 도당체 알아먹을 수 없는 복잡한 용어들과 수식어들로 나열된 말 속에는 '일단은 수면제를 처방해줄테니 그거 먹고 푹 자봐라. 마음을 편히 먹고 잠들어라. 잠이 잘 오는 아로마 요법과 족욕과 기타 등등을 병행해봐라. 당신이 말하는 존재감은 심리적인 요인일 것이다.'…라는 내용밖엔 없는 것이다.
다행이도 밤에 잠을 잘 때만 해당되는 사항이고, 아침과 낮 시간에 잠들면 꿈을 꾸지 않는다. 밤에 작업을 하고, 아침에 잠들어서 오후 느즈막히 깨고, 공적인 일은 저녁 시간에. 지난 1년간 몸에 배인 생활 패턴이었다. 얽매여 일하지 않는 프리랜서인데다 돈이 썩어나는 집안이라 망정이지 그렇잖았다면 서울역 앞에 나앉았을지도. 다만 여전히 밤에는 졸리웁고 눈이 따가운 것은 어쩔 수 없었다.
- 맛있다.
장조림을 씹으며 말하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만 먹지 말고 나물이랑 김치도 먹어. 김치도 씻어먹지 말고 그냥 먹어. 고추가 몸에 좋은 거야. 잔소리를 늘어놓는 그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난 장조림의 고기와 메추리알만 입안으로 우겨넣었다. 그가 만드는 음식들은 다 맛있지만 그의 김치는 정말 눈물나게 맵다. 고추도 자주색으로 잔뜩 말라비틀어진 요상한 것을 쓰는데, 그게 그렇게 매울 수가 없다.
- 니가 만든 김치는 너무 매워.
- 적당히 매운 것도 몸에 좋아.
- 그게 어딜 봐서 적당히야….
시시껄렁한 잡담을 주워섬기며 밥을 먹던 중 그의 옷차림에 눈이 멈췄다. 그는 양복을 입고 있었다. 밝은 갈색 계통의 슬림핏 정장. 거기에 넥타이와 넥타이 핀은 내가 생일선물로 사준 노랑 미키세트. 사실 그를 놀리기 위해 선물한 것이지만 그는 마음에 든 모양인지 잘만 차고 다녔다.
- 너 정장 정말 안 어울린다.
- 질투하냐, 최초딩.
- 아니… 진짜야. 너한텐 노랑이 잘 어울려.
- 그래서 넥타이 노란 걸로 찼잖아. 네가 허구언날 그 소리만 하니까.
- 노란 정장은 없나….
- …밥이나 먹어.
사실은 잡아두고 싶다. 빌어먹을 재킷을 벗기고, 넥타이도 풀어헤치고, 와이셔츠도 뜯어버리고. 별다른 흑심은 없다. 다만 그가 출근하고 나면 몸서리쳐지게 큰 집 안에 홀로 덩그러니 남겨지는 것이 싫을 뿐.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자신이 비운 밥그릇과 수저를 들었다.
- 나 이제 다녀올게. 얼른 자.
- 그래….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어딘가 모호한 데서 끊었고<? 근데 2편엔 별 내용이 없음. 응? ^_^
2편에서 밝혀진 것. 1. 무현과 서운은 고등학교 동창이었다. 2. 무현이 밤에 자꾸 잠이 들지 못하는 이유는 꿈의 존재감 때문.
3. 서운이 담군 김치는 겁나 맵다. 4. 최초딩은 노랑을 좋아한다.







최근 덧글